귀불 Dummy Buddha(2022)


귀불(佛)


제가 처음 불화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 인터넷을 떠돌던 게시글을 통해서였습니다. 언뜻 기괴해 보이기도 하는 불교의 고전 작품들이 그저 신기한 유머 글로 취급 받고 있다는 것이 사뭇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분명히 <지옥도>나 <구상도> 같은 것들은 특유의 내용과 표현 때문에 지금도 눈길을 끄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토양에서 비롯되고 발전되었을 불교 미술의 문법이 지금의 문화 안에서 낯설고 신비롭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다소 복잡하게 느껴졌습니다. 어쨌든 주변부로 밀려났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새 가장 속된 방식으로 다시 소환되고 있다는 사실은 꽤나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2015년부터 시작한 <Dummy> 연작은 불교 회화에 대한 반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늘 제게 무섭거나 혐오스러운 것들, 이른바 ‘부정성’을 미술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부정성을 받아들이고, 또 해소해 나가는 과정이 어릴 적 경험했던 종교의 그것과 너무나 유사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화가 보여주는 특유의 조형 코드가 부정성을 다루고 통제하는 중요한 질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의 작업에서 불화 자체를 전면에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구상도>에서의 육체적 분절 과정을 형태와 질감에 집중하여 그리기의 질서로 재구성하려 했던 2019년의 9점의 연작, 그리고 <108 번뇌>에서 대상을 3가지 상태로 바라보는 방식을 나방에 대한 복잡한 태도로 치환하여 그리고자 했던 2021년 18점의 연작들이 그것입니다.

일련의 작업 과정은 불교 회화에서 정해진 도상이나 기법이 아니라, 그것을 구축하는 조형 질서를 작업의 방법론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던 노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단단한 형태에 더러운 질감을 부여한다’라는 다소 단순명료한 명제로 귀결되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불화를 경유하는 제 작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회적인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동안 해 온 작업 방식들이 마치 고여있는 우물을 퍼 올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젠가 고갈될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더 무감각해지기 전에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작업들은 과거에 벌레 같은 대상을 내세웠던 것과는 달리, 불화 자체를 직접적인 소재로 삼았습니다. 총 10점의 고전 작품이며, 모두 한국과 일본의 불교 회화들입니다. 어떤 것은 실제로 보기도 했고, 또 어떤 것은 도판으로만 보던 것들입니다. 이 원작 불화에서 유달리 감응되던 부분들을 6가지의 조형적 관점으로 재구성하여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의태-구도-형태-질감-변용-응용


Dummy No.81, 2021, 삼베에 안료, 53×35cm(족자 138×47cm)
Dummy No.82, 2022, 종이에 먹과 안료, 89×40cm(족자 154×51cm)

의태 경우 원작을 흉내내고 있는 작업입니다. 종종 불화에 재현된 보살의 모습이 언뜻 귀신처럼 섬뜩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상적이고 절대적인 존재가 종종 공포의 대상으로 느껴지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원본 작품의 도안을 그대로 가져와 그와 정반대되는 모습으로 다시 그려냈습니다. 본디 불화가 같은 도안으로 오랜 시간 반복되어 그려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리 특별한 작업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원작이 발휘하는 기대효과를 완전히 뒤집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가지가 서로 맞닿아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작업들이 원본과 쌍을 이루는 자매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Dummy No.81, 82).

Dummy No.84, 2022, 종이에 먹과 안료, 144×66cm(프레임 166.5×78cm)
Dummy No.83, 2022, 종이에 먹과 안료, 144×66cm(프레임 166.5×78cm)

구도 불화에서 즐겨 쓰이는 금니와 문양에 관한 것입니다. 오래된 불화는 보관상태에 따라 안료 층이 무너지거나 뭉개지기도 하는데, 종종 금으로 그려진 광배와 문양들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습니다. 이번 작업에서는 절묘한 삼체의 구도를 강조하는 <아미타삼존도>에서 금칠 광배의 밑으로 더러운 피부를 불어넣었습니다. 어두운 화면에 무수히 많은 선을 중첩하거나 끝없는 붓질로 생채기 남은 종이의 질감을 만드는 것은 제가 작업에서 즐겨 그려오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지저분한 표면 위를 금빛으로 장식하고 있는 이번 작품은 어쩌면 작업의 성격을 가장 드러내고 있는 듯합니다 (Dummy No.83, 84).

Dummy No.85, 2022, 종이에 먹, 180×87.5cm(프레임 199×105cm)
Dummy No.86, 2022, 종이에 안료, 180×87.5cm(프레임 199×105cm)

불화에 그려진 보살의형태 때때로 벌레처럼 보이곤 합니다. 특히 <천수관음>이나 <십일면관음> 자체로 다리 많은 벌레를 떠올리게 합니다. 어떤 벌레들은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형용치 못할 감정에 휩싸이게 합니다. 벌레는 저의 무엇도 위협하지 하는데 말이죠. 언뜻 박물관의 거대한 불화 앞에서 벌레를 대면했을 느꼈던 유사한 무언가를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개의 작업은 <십일면관음도> 각각 다른 방식으로 벌레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원작에서 보여주는 복잡하고 자잘한 형태를 벌레의 몸과 같은 방식으로 다시 구조화하고자 했습니다. 암수의 느낌으로 그려진 작품을 쌍의 부부로 여기고 싶습니다 (Dummy No.85, 86).

Dummy No.87, 2022, 비단에 안료, 142.5×55cm(족자 213×67cm)
Dummy No.88, 2022, 비단에 안료, 163×81cm(족자 213×81.5cm)

불화는 비단에 그려진 그림이 많습니다. 그리고 비단 그림의 특징은 배채법을 통해 바탕재의 뒷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단 회화는 매우 오묘한질감 드러내곤 합니다. 양쪽 면을 활용하는 방식이 상반되는 무언가를 하나로 합치시키는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과거 작업 <가래 드로잉> <> 연작은 서로 정반대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래 드로잉> 몸에 쌓여있을 법한 더러운 물질들을 아주 섬세한 형태와 덩어리로 상상해 작업이고, <> 피부로 드러난 상처를 하나의 성스러운 기호로 인식하는 질감에 대한 작업입니다. 오래된 불화가 보여주는 독특한 비단의 질감에서 <가래 드로잉> <> 앞뒤의 화면에 공존하는 것을 상상했습니다. 이번 작업은 비단의 양면을 활용하여, 면은 섬세한 선묘로가래보살, 다른 면은 안료를 겹겹이 쌓아가며흉진 처럼 그려내려고 했습니다. 다소 과하고 우악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작가로서 점이 조금은 귀엽게 보이기도 합니다 (Dummy No.87, 88).



Dummy No.89, 2022, 종이에 먹, 288×74cm

Dummy No.90, 2022, 종이에 안료, 69×69cm

어떤 그림을 , 특히 종교화를 때면 안에 묘사된 대상을 전혀 다른 무언가로 대치하는 놀이를 하곤 합니다. 어떤 신적인 존재 대신, 아주 저급하고 더러운 무엇으로 말이죠. 거기서 발생하는 낙차를 즐기는 것이지만, 사실 낙차를 수직이 아닌 수평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작업이기도 합니다. 지난 여름, 습한 밤에 출몰했던 무수히 많은 지렁이들을 보면서 일본에서 봤던 용이 그려진 거대한 회화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아주 정교하게 그려진 만다라 그림들을 보면서 작은 돌기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유륜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다른 작업들이 원본 작업에서 출발하는 것과 달리, ‘변용 현실에서 만난 대상들을 불화의 피부로 덧씌우는 작업입니다. 이렇게 하면 징그럽기만 하던 지렁이도 조금은 엄숙해질 있는 걸까요? (Dummy No.89, 90).


Dummy No.91, 2022, 종이에 먹, 92×64cm

마지막으로 제시하는 작업은 원작이 없습니다. ‘응용단계라고 규정한 작업들은 과거의 작업과 미래의 작업을 동시에 제시하고, 작업이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불교나 불교 회화가 아닌, 그것을 제가 어떻게 이해하고 소화해 내는가 입니다. 앞으로 저는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좋아지지 않는, 이른바 혐오음식(내장, , ) 따위를 마치 성인처럼 그려내는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내장에 다른 동물의 내장이 들어온다는 사실이 불쾌했습니다. 이번에 가장 먼저 그린 것은 < 곱창>입니다. 그리고 성인이 무수히 많은 음식 혹은 부위들이 종국에는 하나의 몸체를 이루어 거대한 신이 되는 것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1층에는 2021년에 진행했던나방과 번뇌 관한 과거의 작업을, 또한 같은 위치의 2층에는 구상하고 있는 미래의 작업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현재의 작업과 더불어, 이것들이 서로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는지 지켜보고 싶습니다 (Dummy No.63~80 9, Dummy No.91).


이번 작업들은 그동안 제대로 마주 보기를 꺼렸던 불화를 대면하는 것과 동시에 이제는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업은 늘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가 버립니다. 처음에 세웠던 작업의 질서들은 종종 무너지고, 또 그 경계가 희미해지기도 합니다. 사실 이미 완전한 원작을 건드린다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번 작업들을 진행하며 원작의 흉내는커녕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한계를 느끼곤 했습니다. 어쩌면 공들여 세운 6가지의 규칙이 사실은 제 미숙함을 감추려는 그저 허울 좋은 변명거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중요한 것은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태도라는 것을 다시금 떠올립니다. 불화를 외피로 삼아 뭔가를 긋고, 칠하고, 다듬다 보면 어느 시점에선가 그것은 더 이상 불화가 아니게 됩니다. 결국 화면은 강박적인 꾸덕임이 지배하는 어떤 집착의 산물로 가득 차 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이 허물(Dummy)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저는 이 그림들을 비로소 ‘귀불(Dummy Buddha)’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2022년 10월

박웅규 드림




전시전경(촬영: 권오열)


Dummy Buddha

It was after I came across a comment on the Internet quite a while ago that I came to be interested in Buddhist paintings. I was amazed by the fact that the classical artworks of Buddhism were treated as a source of humor simply because they appear weird. Buddhist paintings such as Hell Scroll (Jiokdo) and Nine Phase Diagram (Gusangdo) still attract our attention for their unique content and expression. It leads us to complex feelings that the grammar of Buddhist art, formed and developed by the artists of our land, is now treated as foreign and mysterious even in our cultural context. I found it quite interesting that those that we thought had been relegated to the periphery are now summoned to the contemporary world in the most secular manner. 

My Dummy series works began with my response to Buddhist paintings. The fact is that I had always wanted to express those that scared me or which I abhorred—that is, “something negative”—with my artistic language. I thought that the process through which I embraced and resolved negativity was very similar to that of religion I experienced in my childhood days. I also thought that the unique aesthetic codes in Buddhist paintings would be an important order to deal with and control negativity. It was not my intention, however, to reveal the Buddhist paintings themselves to the forefront of my art. For example, in the nine works of the Nine Phase Diagram series I produced in 2019, I tried to reorganize the forms and textures of the physical segments using the order in painting; and in the eighteen works of The 108 Afflictions series in 2021, I attempted to depict the way to look at the subject in three different states by substituting it with the complex attitudes toward a moth.

The process of my painting in these works was aimed at reorganizing not the icons in the traditional Buddhist painting or the techniques used to depict them but the aesthetic order that constructs them by using the methods devised to support it. The result of my effort may be concluded by the simple proposition that “it gives dirty texture to a solid form.” This is probably the most important part of my journey that I need to pass as an artist through Buddhist painting.

There is, however, a limit to the indirect method. It hit me that the methods I had relied on were like pumping water from a well without a water source. I knew as anyone would, that the well would dry up sooner or later. I needed to change my direction before I became numb to the situation surrounding me.

 Unlike my earlier paintings where I chose insects as the main subjects, the works shown here reflect my keen interest in classical Buddhist paintings. I chose a total of ten Buddhist paintings created by old masters in Korea and Japan, some of which I had gotten a first-hand look at with others only through prints. I tried to capture from the original paintings the elements that struck me hardest, reorganizing them into six categories based on aesthetic viewpoints.

 

Imitation – Composition – Form – Texture – Transformation – Application

 

My works in the category of “imitation” refer to those wherein I imitated original Buddhist paintings. Bodhisattvas captured in some Buddhist paintings appear as ghostly beings with terrifying looks. I thought that such images represent the tendency that an ideal and absolute divine being could appear to the viewer as an object of terror. I took the images from the original painting and painted them into forms antithetical to the original. It may not have been a special work considering the fact that Buddhist paintings have a long tradition of being imitated over many generations. What I intended with the works was to overturn the effect one could expect from the original, insisting that the two—the original and the imitated—were in fact closely connected. I wanted my images to be the sisters of the original images. (Dummy No. 81, 82)

 

The “composition” is related to the tradition of using “gold pigment” for Buddhist paintings. We often find from old Buddhist paintings that the haloes and some ornamental parts painted gold retain their original splendor even after all other pigments lose their original color. In Amitabha Triad, a painting where one of the most important visual elements is the composition of the three bodies, I put dirty skin under the haloes painted with gold. I also used the technique I favored in my earlier works—that of overlapping numerous lines and repeatedly applying brush strokes on the dark background, creating a space full of scars. I believe these two paintings in which the messy surface is covered by golden ornamentation best represent the characteristic feature of my activity as an artist. (Dummy No. 83, 84)

 

The “form” of the bodhisattvas in Buddhist paintings often appears as that of an insect. The bodhisattva of compassion in Thousand-Armed Avalokiteshvara and Eleven-faced Avalokitesvara, for example, reminds viewers of an insect with many legs. A look at a certain insect can drive the looker to an indescribable feeling of aversion, although the act of looking alone can lead to no harm. I sometimes associate the feeling I had when I looked at the huge image of Avalokitesvara depicted in a Buddhist painting with the one I had when I faced a large insect. The two paintings presented here are intended to show the images of insects inspired by the painting of the Eleven-faced Avalokitesvara. I wanted these paintings to reorganize the complex form of the deity in the original painting into the body of an insect. I also wanted the two images in my works to appear as a male and a female, which I consider as a married couple. (Dummy No. 85, 86)

 

Silk has traditionally been one of the most popular mediums for Buddhist painting. One characteristic element of silk painting is the use of the “rear coloring” technique by which the artist considers the rear face of silk fabric to be as important as its front face. The technique of using the rear face often results in the creation of highly ingenious “texture.” When I was first introduced to this technique of using both sides of silk fabric as a painting medium, I thought it was like uniting two contrasting things. Among my works, the Sputum Drawing and Scar series display contrasting features. The works titled Sputum Drawing were based on my imagination of the dirty materials that should have been piled up in my body, depicting them as lumps in subtle forms, while those in Scar were to express my interest in texture for which the scars on the skin were portrayed as a sacred sign. I imagined from the unique texture of the old Buddhist paintings that use both faces of silk fabric that Sputum Drawing and Scar coexist on both the front and rear faces of each painting. With the imagination, I used both faces of silk fabric for the two paintings, creating Sputum Bodhisattva depicted with fine lines on one face and Bruise and Scar on the other wherein the images were rendered by piling pigments layer by layer. The images may appear excessive and coarse to some viewers, but I love them for the somewhat delightful atmosphere they create. (Dummy No. 87, 88)

 

When I look at a painting, religious paintings, in particular, I play in my imagination the game of replacing the subjects depicted in the paintings with something totally different from them. If the painting portrays a divine being, I change it to something very base and mean. I like the dramatic conversion of the subject, although what I intend in my art is not a vertical change but a horizontal one. Last summer, I happen to see a swarm of earthworms crawling somewhere on a humid night. The sight reminded me of a large dragon painting I had seen in Japan. Similarly, a look at the paintings of the mandala led me to the areola with protuberances. While some works are made simply by copying the original, some others “transform” the original image, covering the subjects I come across in real life with the skin of disharmony. If then, could even the repulsive earthworms turn themselves into sacred beings? (Dummy No. 89, 90)

 

The last two paintings have no originals because they are the original works themselves. Having put them in the category of “application,” I wanted them to present my works in the past and those to appear in the future and show the way my art would take for its future. What is important in my career as an artist is not Buddhism or Buddhist art but how I understand them and how I get inspiration from them. One of my plans for the future as an artist is to paint the foodstuff hated by many ordinary eaters including myself, such as animal intestines, blood, and bone, as saints. I hated allowing the intestines of other animals into my intestines. The first painting I produced under the subject is Saint Intestines. It will be followed by the work depicting a gigantic deity whose body comprises all kinds of weird foodstuff canonized into saints. In this exhibition, my works painted in 2021 under the theme Moths and Afflictions are displayed on the first floor, and the works I will complete in the future, on the second floor. I want to know how these works will be connected organically with each other and with the paintings I am currently working on. (Nine works among Dummy No. 63~80, Dummy No. 91)

 

The paintings in this exhibition are the results of my effort to face directly the Buddhist paintings I had long abhorred to have a direct look and to be free from them. But things do not go as planned as I have often experienced. The initial order of my work falls down easily, rubbing off the boundary between things. Since the originals were already immaculate, I realized that it was not easy to imitate the originals while working on these works. The six categories I elaborately set to explain my works exhibited here may only be an excuse to hide the immatureness of my art. 

 

Despite that, I believe what is important is not the object but one’s attitude toward it. If I get inspired by a Buddhist painting and continue to draw lines, paint with pigments, and give finishing touches under its spell, I realize that at some point that the painting I make is not a Buddhist work but some space packed with fragments of obsession under the rule of compulsion. When I came to be aware that all these have become “dummies” I decided to give the title “Dummy Buddha” to all my paintings.

 

 

October 2022

Wunggyu Park



Dummy No.81, 2021, pigment on hemp, 53×35cm(scroll 138×47cm)

Dummy No.82, 2022, ink and pigment on paper, 89×40cm(scroll 154×51cm)

Dummy No.83, 2022, ink and pigment on paper, 144×66cm(frame 166.5×78cm)

Dummy No.84, 2022, ink and pigment on paper, 144×66cm(frame 166.5×78cm)

Dummy No.85, 2022, ink on paper, 180×87.5cm(frame 199×105cm)

Dummy No.86, 2022, pigment on paper, 180×87.5cm(frame 199×105cm)

Dummy No.87, 2022, pigment on silk, 142.5×55cm(scroll 213×67cm)

Dummy No.88, 2022, pigment on silk, 163×81cm(scroll 213×81.5cm)

Dummy No.89, 2022, ink on paper, 288×74cm

Dummy No.90, 2022, pigment on paper, 69×69cm

Dummy No.91, 2022, ink on paper, 92×64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