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내장 기담」 (2023) [1] [2]


윤형신



피부와 내장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나요? 내장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그리는 이라면 몸이 뒤집혀 걸어 다니는 존재를 상상해 본 적이 있을 듯합니다. 뱃속이 뒤집힐 것 같다는, 살갗이 뒤집힌 것 같다는, 아픔에 관한 그런 은유 말고요. 그러니까 자신의 머리를 자신의 항문이나 질구에 넣어서, 피부가 내장이, 내장이 피부가 되어, 다시 태어난 듯한 모습을 갖춘 사람 말입니다. 상상 속의 그는 기이한 모습이겠지만, 피부와 내장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그를 마주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어렸을 때 저는 내 몸의 부피만큼 내가 남이 차지할 자리를 빼앗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몸이 성장할수록, 차지하는 공간의 크기가 커질수록, 남의 것을 빼앗아 이렇게 자라난 거라고, 타인의 어깨에 부딪힐 때마다 죄스러움을 느꼈습니다. 타자의 내장에서 이물감을 느끼는 당신은 살갗의 마주침을 넘어, 내장과 내장의 마주침을 저보다 더 예민하게 느끼고 있겠지요.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나와 타자가 명확히 구분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만일 그렇다면 먹는 행위는 이물을 몸 안에 담는 행위가 아닐 겁니다. “혐오스러운 음식이든, 너무나 사랑하는 대상이든, 어쩌면 먹고자 하는 욕구란 대상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가장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함의일지도 모른다”[3]라는 당신의 말처럼, 어쩌면 먹고 먹히는 관계는 서로를 만나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듣기로 어떤 동물은 자기 자궁에서 나온 새끼를 가장 안전한 뱃속에 담기 위해 새끼를 먹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죽은 새끼는 다시금 어미가 되고, 남은 새끼의 입에 물릴 젖이 됩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저 또한 죽음과 삶이라는, 때로는 폭력적인 순환의 고리와 뒤섞여 굴러가고  있음을 되새기게 됩니다. 내장과 피부가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피부에 생겨난 흉이”몸 외부로부터의 침식인지, 몸 내부에서의 균열인지” 알 수 없었다는 당신의 말이 환기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당신에게 병이 있었듯 저 또한 병이 있었습니다. 병을 낫게 하는 수술은 몸의 털을 깎고, 공기를 넣어 배를 부풀린 다음, 수술 기구로 혹을 떼어내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며칠간 피 주머니를 달아야만 했습니다. 배에 달린 주머니 덕에 몸에 고였을 피는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달랑달랑. 또 하나의 장기가 생긴 느낌이었죠. 다 나을 때쯤 의사가 새로운 장기를 제거하자고 말했습니다. 맨손이 관을 죽 잡아 뺄 때 내장을 훑고 지나가는 관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 몸에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몸은 껍질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십우도〉(2023) 중 아홉 번째 그림은 내장을 통과하는 소의 시선인가요, 아니면 바깥을 내다보는 바깥. 이쪽을 응시하는 내장의 시선인가요? 무엇이건 당신이 양가성에 관심을 둔 점을 떠올려 보면, 둘 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십우도>의 마지막 그림에서 소년이 양껏 잡아먹은 소의 내장이 장기를 통과해 소의 여신으로 거듭나는 걸 보면, 죽음과 함께하는 물질의 변환은 또 다른 탄생의 과정이 되는 걸까요? 아니면 소는 아직 죽지 않은 걸까요? 소년의 장기에서 피가 분출하는 까닭은 소의 여신이 복수를 행했기 때문일까요? 내장을 더 이상 먹지 않는 당신은 복수가 두려웠던 걸까요? 저 또한 당신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이유로 내장을 먹지 않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내장에 관한 이미지는 왕왕 마주치기 마련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길을 걷다가 대창 구이 밀키트 광고물을 발견했네요. 싱싱한 내장은 과거에는 몇몇 이들만이 구할 수 있는 식재료였지만, 공장식 축산업과 유통업, 수도시설이 발달한 오늘에는 남김없이, 걱정 없이, 모두가 먹을 수 있는 깨끗한 상품으로 홍보됩니다.  하지만 당신의 그림에서 내장은 예쁘게 손질된 모습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그리기란 부정한 것을 삭제함으로써 매끈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죠. 금기시되어 터져 나오는 것을 매끄럽게 봉합하며 유통되는 광고 이미지와는 차별적입니다. 그 때문일까요? 깨끗이 죽어 가공되지 않았더라면 얼굴을 찌푸리게 했을 내장은 그림의 몸을 입은 채 기이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림으로 그려진 내장과 과연 어떤 상태인 걸까요? 이 기이한 느낌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한 외과 의사는 인간이 살아있음을 느낄 때가 수술을 위해 개복을 했을 때라 말했습니다. 마취 후에도 생생히 깨어 움직이는 장기가 눈을 뜨고 걷는 사람보다 생의 느낌을 잘 전달해 준다고요. 그러나 당신이 그린 내장은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라기보다는 껍질Dummy을 안고 부활하여 여기를 바라보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중 내장신의 내장을 <Dummy No.101>은 신은 해부될 수 없다는 관념에 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에는 신마저 난도질하겠다는 도전 의식이 담겨있는 걸까요? 평소 당신의 태도를 볼 때 그렇지는 않은 듯합니다. 내장신의 내장은 부위 별로 찢겨 취급되는 것들을 다시금 한데 모아 뭉그러뜨린 모습입니다. 단번에 조망이 어려운, 눈으로 훑고 쓸어야 하는 그림. 어디가 어디인지 명확히 알 수 없게 한 구성은 대상을 해부하여 체계화하려는 정복자의 태도와는 다른 지점에 있죠. 내장신은 기다렸다는 듯, 감출 수 없이 드글드글 끓어오르는 ‘부정’의 관념을 내보입니다. 내장신 자체가 사회적 금기가 모여 탄생한 존재니, 신을 난도질하려는 의도냐는 제 질문이 애초에 잘못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당신의 내장 그림은 아픔이나 불쾌감, 두려움과 같은 원초적인 감각과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같은 감각과 감정은 특히 촉각과 관련됩니다. 여기에는 우선 물컹하고 핏기 어린 소재가 불러일으키는 촉각적 효과가 있겠지요. 그림의 바탕재와 촉감 또한 기묘함을 자아냅니다. 먼저, 내장신의 내장을 그린 삼베는 수의에 쓰이는 천이라는 점에서 죽음을 떠올리게 할 뿐 아니라 까슬한 느낌을 줍니다. 다른 그림들을 보면, 불균질하게 반수된 바탕에 침투한 먹물은 피부의 멍을, 붉은 안료를 뒷면에 칠한 비단은 핏기가 성성한 반투명한 살갗을, 종이 전면에 바른 붉은 돌가루는 엉긴 핏덩이를 연상케 하죠. 이 같은 재료는 미묘한 자장으로 서로를 당기며, 보는 이의 촉각을 예민하게 일깨웁니다. 낯선 존재가 피부를 타고 기어오를 때의 소름, 살갗이 까인 아픔, 무언가를 삼켰을 때 메슥거리는 기묘한 감각을 말입니다. 요즘 저는 제 안의 수많은 존재들을 깨닫고 있습니다. 남의 자리를 침범한다는 생각을 넘어, 나라는 신체를 배지培地 삼아 존재하는 것들을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어 사라지는 모습을 그린 구상도처럼, 나와 내 몸의 모든 것이 해체되는 상상을 합니다. 그를 자유로 여긴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조금은 덜어질지 모르지 모르겠습니다. 작가의 말로 끝을 맺는 글은 게으른 글이겠습니다만, 당신의 노트에서 마주친 이 말은 당신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상반되는 무엇으로 여겨졌던 존재들의 낙차를 수직이 아닌 수평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다.”는 당신의 말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1] 내장 1. 內臟 : 척추동물의 가슴안이나 배안 속에 있는 여러 가지 기관을 통틀어 이르는 말. 2. 內藏 :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안에 간직함. 3. 內障 : 마음속에 일어나는 번뇌의 장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none (2023년 8월 10일 검색).

[2] 기담 1. 奇談 :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2. 氣痰 : 칠정(七情)이 울결하여 생기는 담. 가래가 목에 걸려서 가슴이 답답하고 거북하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https://stdict.korean.go.kr/ search/searchResult.do?pageSize=10&searchKeyword=%EA%B8%B0%EB%8B%B4#none (2023년 8월 10일 검색).

[3] 따옴표는 작가의 인용.


*이 글은 뮤지엄헤드의 전시 ⟪더비매치: 감시자와 스파이⟫ (2023. 9. 1. ~ 23.)의 필자 매칭을 통해 윤형신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윤형신님께 있습니다. 인용 시에는 출처 표기 부탁드립니다.(윤형신 블로그: https://brunch.co.kr/@tnrud2178)




경계의 저편* (2022)


정재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자살

사전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이라는 의미로 기재되어 있다.

아마도 내가 시도할 일은 평생 없을 행위이다. 


그것은 도덕적 관념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이유에 기인한 것이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어쨌든 지금 그녀는

죽으려 하고 있다.

신입생의 감색 리본이 

봄바람에 나부낀다.


여기서 이야기 전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주인공이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참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공이 소극적이라 이야기가 멋대로 전개되는 것이다.


명백히 후자였던 내가

이번에는 왜인지 전자를 선택했다.** 

그는 전자였을까 후자였을까.

현재 유행하는 성격검사는 맨 앞서서 당신에게 외향적인가 아니면 내향적인가 묻는다. 하루 종일 나만의 세계에 몰두해서 그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든다는 것은 내향적인 일이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이야기를 작품이 계속 소리치고 있으면 그것은 엄청나게 사회적으로 외향적인 활동이 되는 것일 터인데 인간이라면 으레 누구나 내향인이어도 외향인이 되고 싶어 하는가, 내향인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가, 내향인/외향인을 소수의 깊은 정도의 관심과 다수의 낮은 정도의 관심으로 그저 구분 지으면 되는 것일까. 내향인으로 구분된 모두가 사회에서 버티고 살아가는 것이 좀 버겁다고 모두를 동일하게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일이겠으나 사실은 지금을 살아내는 것은 내향인뿐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힘든 것임을 안다. 경제, 사회, 문화의 어느 곳 앞에서도 안전하지 않은 곳은 없으니까.

박웅규의 작업을 자세히 보다 보면 사회 안에서 무기력해진 우리들의 초상이 떠오른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고 측정되면서 결국 위축되어버린 존재들이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내재된 문화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경계 나누고 장벽을 치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수만 가지의 것이 존재한다. 자세히 보라는 유명 시인의 시구를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작동시키고 있는 그 시스템이 이미 너무나 강력해져 버려서 어찌 보면 그것을 최초에 철저하게 거부하지 못했던 것이 나의 무기력 상태를 점차 내재화 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가만히 좀더 생각해보면 이것조차 순진한 발상이고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이기적이고 이타적인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만, 그 경향이 어느 정도씩 한쪽으로 기울어져 존재하고 있다가 양극단의 놓인 각각의 세상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그 경향을 가진 나를 드러내는 것에 당당해지며 그 성향을 더욱 과도하게 보이기를 스스로 원했던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박웅규의 작업에서 나는 이 경계 속에서 사회적으로 도태되고 만, 남들에게는 좀 더럽고 하찮은, 아니 하찮다는 것보다 더 강하게 더러워서 멀리하거나 혐오하거나 죽여서 없애 버리고 싶은 존재들의 군상을 마주한다. 2022년 10월 30일부터 11월 20일까지 통의동 아트스페이스 보안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개인전 《귀불(鬼佛)》에서는 이번 개인전에서 처음 선보이는 신작과 함께 지금까지 작업해 온 그의 다양한 작업들을 조금씩 모두 엿볼 수 있는데, 2019년부터 시작한 <흉> 시리즈와 <십이지해>의 해물들(2020), 십팔나방(2021)의 일부 그리고 아주 초기작 중 하나인 가래 시리즈(2012~)가 이번 신작과 함께 전시되며 그의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대부분의 작품 제목은 더미(Dummy)로, 그 자체로 시체와 시체가 쌓인 무덤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용어이다. 더미들은 연꽃 위에 올라탄 아미타불의 형태를 보이면서도 빨간 반점의 피부병을 가지고 있거나, 곧 썩어 문드러질 것 같은 곰팡이들로 가득 차 있다. 가장 자비로운 천수관음의 40개의 팔은 절지동물과의 벌레 다리로 치환된다. 분절된 신체의 기관들이 갖는 둥근 구멍과 관들은 당장이라도 몸 안에 존재하는 체액과 분비물들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존엄하고 신성했던 성화의 인물들이 도상적으로 규격화 되어 있었을 뿐 벌레의 그것과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는 작가의 생각은 신성과 비천함을 구분 짓지 않던 처음 종교가 시작되던 시기, 초기 종교의 그것과 닮아 있다. 시체들에게 둘러진 어스름한 광배는 이 성자와 거지가 모두 같은 것임을 말해주듯 조용히 자신을 드러낸다. 마치 용이 되지 못한 지렁이가 한편에서 어스름한 빛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Dummy No. 89)

하지만 현실의 우리에게는 나 스스로 아무런 계기도 없이 생각만으로 지옥을 왕궁으로 스위치를 켜듯 전환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저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처럼 차라리 이상한 페티시라도 만들어 그들이 살아 나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 아마도 하루하루 지옥 같은 개별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별종자에게는 훨씬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나에게 초반에 했던 말처럼 나방과 나비는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같은 종이라고 말했다. 그럴 것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삶에 맞는 조건으로 그 색과 습성을 가지고 지금의 형태로 진화했을 뿐. 송충이의 부드럽게 촘촘한 모질이라든가 단단한 것처럼 보이는 자벌레의 동일 마디 하나하나가 앞뒤로 줄었다 늘었다를 반복하며 부드럽게 움직이는 모습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 조금만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들임에도 막상 그것을 세부적으로 묘사해서 커다랗게 확대해서 보여주기 전까지(실물을 그대로 두는 것은 그 자체로 여전히 너무 강력한 부정적 감정을 낳기 때문에) 우리가 용기 내어 다가가 너라는 대상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음을 인정하겠다. 페티시라는 용어를 부정적 용어의 도입 바로 그 직전까지 볼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면, 페티시와 같은 일종의 집착증을 무엇을 인지할 수 있는 계기로 이해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처음에는 그것이 이유가 되어 그 사람을 돌아보게 되고, 점차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고 싶어진다. 처음 이 애니메이션의 도입부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구하는 이유가 "어쨌든 너처럼 안경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죽어서는 안 돼! 한 마디로 안경이 너무 좋아!" 라고 온 마음을 담아 소리친 것처럼.

사회적으로 소외된 존재가 많아지고 음지라 불리는 사회 시스템 밖에서 그들의 존재가 커져 가면 그들의 정신적 상태가 얼마나 취약한지 나는 현실 가까이에서 느끼고 있다. N포세대, 사토리와 같은 조어는 뉴스와 보고서 등 사회과학 수준에서 다루어도 좋을 정도의 순화된 표현이고 한 5년 전만 해도 내가 들었던 가장 충격적인 말은 중고등학교 정도의 아주 어린 학생들이 무슨 일이 생기거나 단순한 문제들에도 대화 중간에 감탄사처럼 튀어나오는 '아 자살해야겠다'였다. 나에게 자살이란 내가 아무리 말하고 주장해도 누구도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때, 말로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동의나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안의 심각성을 알리고 경각심을 주는 제일 마지막 순간에나 떠올리게 되는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가장 최소의 단위였는데, 지금의 세대에게는 이 개념이 일상의 '큰일났군' 정도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그들이 가진 생의 의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현재의 우리는 외부의 사소한 충격에도 쉽게 이 삶을 포기할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살의 징후는 사실 현재의 일만은 아니다. 자살 집단의 확장된 범주는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슬람계 폭탄 테러 집단으로 별칭 되는 ‘IS’(The Islamic State)가 그러하며,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시작으로는 일본의 '신풍'(神風 가미카제)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전투기에 폭탄을 싣고 적군의 전함에 충돌했던 특별공격대의 별칭인 신풍은 광적인 애국주의로 숭고한 희생정신인 것 같이 미화되고 있으나 어리고 무력한 학도병들이 국가의 주도로 전체주의의 권력 내에서 희생된 안타까운 목숨에 다름 아니다. 봄이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젊은 청춘이 죽어야만 하는 상황. 그것도 타의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식으로. 이 절대다수 앞에서 개인은 "전 사람들과 얽히고 싶지 않아요", " 제 안에 흐르는 이 저주받은 피는 평범하지 않아요" (극 중 여자 주인공의 독백)라고 스스로 자신에게 되뇌듯, 자기방어 기제로써 나 자신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방식으로 인터넷 아고라의 세상으로 스스로 계속 침하되어 간다.

결국 이 애니메이션이 묘사하고 있는 경계의 저편이라 불리는 그곳은 인간이 갖은 시기와 원한이 모여 하나의 기묘한 에너지를 내뿜는 곳이자 희망도 동시에 있는 모순처럼 보이는 두 극단이 나란히 존재하는 곳, 지금 여기이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달려간 각자의 방식으로 저주받은 우리들은 마치 종교적 도상들과 같이 엔딩곡을 통해 말하는 '헤매면서도 너를 찾아내는 과정'이자 '얼마든지 괜찮다고 반복해 가는 스타트 라인'이다. 여기서 너는 나를 알아봐 주는 단 하나의 사람이며, 지금이 비록 비천하고 외로울지라도 얼마든지 괜찮다고 기회를 주는 사회적 안전망이다. 시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우리 모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나를 불러주기만 한다면 바로 꽃으로 변하는 것이었음을.




* 2013년 교토 애니메이션이 제작한 동명의 TV 시리즈에서 차용

** <경계의 저편 境界の彼方> 1화의 독백의 도입부에서 발췌



부정을 통해 도달하는 평정. 박웅규의 <십팔나방>(2021)

김남시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아래는 홈페이지에 있는 작가의 작업노트 일부다.

나는 언제나 '부정한 것, 부정한 상황, 부정한 감정' 같은 것들에 기민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그것을 해소해 나가는 과정을 하나의 유희로 받아들인다. 나는 그 과정에서 때때로 종교의 것을 연상한다. 가령 죽은 벌레 시체의 생김새에서 현란한 불교 회화를 떠올리고, 창 밖에 붙어있는 나방 무리에서 성당에 빼곡하게 들어선 성화를 떠올린다. 나는 가장 저급한 것에서 가장 신성한 모습을 떠올린다는 것이 그 자체로 종교적이며, 부정하다고 생각했다. 근래의 몇 년 동안 주로 벌레를 대상으로 작업을 이어왔다. 하지만 내 작업에서 어떤 실체적 대상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벌레이든, 아니면 어떤 성화이든 간에 더 이상 이 둘은 내게서 분리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내가 어떤 태도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분별하고 있는지 이다. 따라서 작업에 드러나는 형상들은 유사 기능을 수행하는 껍데기(Dummy)에 가깝다.”

여기에는 박웅규 작가의 작업 전반을 이해하는데 핵심 개념이 등장한다. ‘부정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부정이라는 단어는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번째로 부정긍정의 반대말로, 무엇인가의 존재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negation’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는 그녀의 말을 부정否定하였다가 그 예이다. 이와는 달리 부정올바르지 못한이라는 규범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는 예를 들어 수능시험에서 부정 不正 행위가 발생했다혹은 정치가의 부정 축재등의 표현에서 사용되는데, 영어로는 ‘injustice’에 상응할 것이다. 이 뿐만 아니다. ‘부정(不淨)’은 축어적으로는 깨끗하지 못한을 의미하지만 주술적 혹은 종교적 맥락에서는 ()스러움을 훼손시키는 것, 따라서 터부시되어야 할 것을 지칭할 때 - “부정한 물건”, ‘부정탄다도 사용된다. 한글로는 음가가 같지만 한자로는 구분되는 이 단어는 많은 경우 이 의미가 서로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은 채로 사용된다. 예를들어 그는 부정적인 사람이야라는 말이, 그가 늘 무언가의 존재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인지, 그가 올바르지 못하게 처신/행위하는 사람이라는 말인지, 아니면 존중받아야 할 것을 훼손하고 공격하는 성향의 사람이라는 말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어쩌면 이 말에는 이 모든 함의가 다 들어있을 것이다. 한자로는 서로 구별되는 이 부정의 함의는 사실상 내적으로 서로 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말로 부정이라고 번역되는 영어 단어 ’negative‘ 혹은 ’negativity’를 생각해봐도 그렇다.

내가 주목하는 건 박웅규 작가 스스로도 자신 작업의 중심 개념인 부정을 이렇게 다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인용한 작가 노트 중 나는 언제나 '부정한 것, 부정한 상황, 부정한 감정' 같은 것들에 기민하게 반응한다.”는 문장을 보자. 여기 등장하는 부정에는 올바르지 못한 것이라는 부정(不正),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는 부정(不淨), ‘어떤 존재의 불승인이라는 부정(否定)의 의미가 함께 울리고 있다면, “나는 가장 저급한 것에서 가장 신성한 모습을 떠올린다는 것이 그 자체로 종교적이며, 부정하다고 생각했다.”는 문장에서는 부정(不淨), ()스러움을 훼손시키는 터부적인 것의 의미가 강하게 부각된다. ‘더미 Dummy’ 연작에 대한 작가 노트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Dummy> 연작은 이미지를 수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스마트폰으로 접하게 되는 부정함에 관한 모든 이미지들을 사진첩에 저장해둔다.” 이 문장에 등장하는 부정함역시 부정(不正), 부정(不淨), 부정(否定) 중 어느 하나로 축소되기 힘든 다의성을 갖는데, 흥미롭게도 이 문장의 영역 - “Starting with everyday encounters, all images of 'negative' are stored in the photo album.” - 부정함’negative’ 로 옮겼다. 역시 부정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작가의 아래 글은 어떤가. “종교의 도상기호는 일정하게 반복되는 도식들이 존재한다. 화면 안에서 형상들이 배치되는 방식이나, 그것을 장식하는 도식의 형태, 혹은 반복되는 수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기호-도상들의 표출 방법들. 이것들은 작업의 원전이 되는 부정함의 대상들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또한 부정한 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스스로 통제하려는 나름대로의 규율이다.” 작가는 부정함의 대상들“the objects of negativity”, “부정한 것‘injustice’로 번역하였는데, 여기서도 부정은 다의적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단서들로 부터 나는 박웅규 작가가 부정에 대해 말할 때는 깨끗하지 못한 것, 정의롭지 못한 것, 나아가 무엇인가의 불승인이라는 부정이라는 단어가 지닌 복합적 함의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추론한다.

2012, 박웅규 작가가 커리어 초반에 그렸던 <가래 드로잉> 연작이나 <‘사리 객담> 작품에서는 부정의 여러 의미 중 부정(不淨)’, 곧 깨끗하지 못한 것, ‘더러운 것의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작가는 가래나 편도결석 등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이 더러운 물질들을 성화처럼 또 사리처럼 만들면서 부정不淨한 것을 그와 대립적인 성스러운 것과 연결시켰다. 박웅규 작가의 스타일이라 부를만한 것이 자리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2015년 이후 더미 Dummy’ 연작에서는 부정의 다른 의미가 전면에 등장한다. 독특하게 패턴화되어 있는 더미 연작 그림들은 어떤 건 곤충이나 벌레 같기도, 어떤 건 블로스펠트가 찍은 식물 같기도, 다른 건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미생물 같기도, 또 어떤 건 성모나 예수의 성상 같기도 하다. <가래 드로잉>이나 <사리 객담>과는 달리 여기서는 그리는 대상들 자체가 부정(不淨)’적인 것이 아니다. 이 작업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떤 대상들을 볼 때에 그 안에서 부정함의 코드를 읽으려 애쓴다. 그리고 그에 부합한다면 나의 사진첩에 저장된다. 작업의 과정에서 그 이미지들을 직-간접적으로 참고하게 된다. 작업에서 이 이미지들은 그대로 재현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서로 교배되거나 변형되기도 하며, 때로는 그 과정에서 전혀 다른 형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미지를 구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종교의 도상기호의 형식을 빌려온다는 것이다.”

혐오스러운 벌레나 곤충 뿐 아니라 일상사물이나 식물, 성상 등의 대상들을 볼 때에 부정함의 코드를 읽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나는 여기 등장하는 부정은 어떤 존재나 타당성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부정 否定이라고 생각한다. 혐오스러운 벌레건, 아름다운 식물이건, 혹은 성스러운 성상이건 그 대상에 부여되어 있던, 거의 우리의 자연스러운 감정적 반응으로까지 고착된 어떤 분위기의 존재나 타당성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벌레의 혐오스러움, 식물의 아름다움, 성상의 성스러움은 그들 자체에 본래적으로 내재한 어떤 속성이나 특질이 아니다. 그건 그 대상들과 관계하면서 우리에게 생겨난 감정, 가치, 규범들의 기묘한 뒤섞임의 산물이다. 이 점에서 그를 대상들의 아우라라 칭해도 좋겠다. 이런 대상들 안에서 부정함의 코드를 읽는다는 것은 이 대상들에 부여된 아우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그에 휘둘리지 않고 그들을 대한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이들은 작가에 의해 서로 교배되거나 변형되어 전혀 다른 형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 否定의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종교의 도상기호 형식이다. 작가의 말대로 종교의 도상기호는 대상을 반복되는 도식 형태, 곧 패턴화하여 표현한다.

주지하듯, 패턴화는 생명체의 생존에 핵심 능력 중의 하나다. 환경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 주변의 세계들을 어떤 식으로든 패턴화하여 그 질서를 파악하지 않으면 생명체는 혼돈스럽고 카오스적 세계 속에서 생존하기 힘들 것이다패턴화는 어떤 대상의 모든 디테일에 일일이 세부적으로 다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일정한 범주로 묶어 낼 수 있는 추상화 능력이다. 사냥에 나선 사자는 서로 다른 형태와 크기, 색깔을 가진 나무와 풀, 흙과 자갈 등의 세부 디테일에 다 주목해서는 풀숲에 숨은 토끼를 잡을 수 없다. 팔과 다리, 깃털 등 수많은 부분들로 이루어진 토끼를 그저 한 마리의 토끼라고 추상화 해 낼 수 없다면 사냥은 불가능할 것이다. 패턴화한다는 것은 세계를 자신 나름대로 파악하고 포착해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며, 그를 통해 생명체는 무한하게 카오스적인 것 앞에서의 막연한 공포와 불안감 대신 그에게 어떻게 대응하고 대처해야할지를 알게 된다인간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물들의 디테일들을 추상화해 패턴과 도식을 포착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행위도 하지 못할 것이다. 박웅규 작가의 더미연작에서 부정否定의 방법은 이렇게 작동한다. 더미연작 이후 박웅규 작가가 내 작업에서 어떤 실체적 대상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벌레이든, 아니면 어떤 성화이든 간에 더 이상 이 둘은 내게서 분리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내가 어떤 태도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분별하고 있는지 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이 부정否定이기 때문이다.

이번 생생화화 전에 출품한 <십팔나방>은 이 부정 否定의 방법론이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난 프로젝트다. <십팔나방>은 총 18개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각 세 개의 이미지를 한 세트로 한 여섯 세트의 작업이다. 그리고 한 세트 내 세 작품은 형태나, 색채, 재료에 있어서도 서로 다르다. 단원 미술관에 걸린 <십팔나방>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가장 아래쪽 작품들은 삼베에 안료로 그려졌고, 중간에 걸린 작품들은 종이에 먹으로, 가장 위쪽 그림들은 종이에 안료로 그려졌다.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이 세 종류의 그림은 작업실에 출몰하는 벌레들을 3가지 방식으로 그린 것이다. 이 세 방식을 작가는 자세히 보고(중립), 형태와 구조를 이해하려 애쓰고(긍정), 질감을 느끼려고 노력한다(부정)”로 제시한다. 이 세 가지 구분은 작가가 불교 교리로 부터 가져온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108가지 번뇌는 눈, , , , 피부 등 우리의 감각이 색, , , 촉각 등을 대할 때 생겨나는 세 가지 느낌에서 출발한다. 감각에 좋은 것()’, ‘싫은 것()’, ‘싫지도 좋지도 않은 것()’이 그것이다. 박웅규 작가는 이를 긍정, 부정, 중립이라는 개념으로 가져와 대상을 표현하는 세 가지 방식 - “자세히 보고(중립), 형태와 구조를 이해하려 애쓰고(긍정), 질감을 느끼려고 노력(부정)하는” - 으로 전유한다.

이런 기반에서 나온 프로젝트 <십팔나방>은 많은 미학적 질문들이, 마치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퍼져 나가게 한다. ‘싫은 것질감을 느끼려고 노력하면 그 싫음이 부정될 수 있을까? 대상을 자세히 보는 것이 그를 좋지도 싫지도 않게만들 수 있을까? 그 대상의 형태와 구조를 이해하려 애쓴다면 좋은 것은 더 이상 좋은 것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닐까? 불교적 수행의 목표는 감각에 좋거나 나쁜 것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 평정 상태에 도달한다면 저녁 창문에 붙어있는 나방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보일까? 등등.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벽에 걸린 18개의 그림을 보다 박웅규 작가는 우리 시대 거대한 이미지 순환 네트워크에 자리잡은 이미지 필터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네트워크를 떠도는 모든 부정(不正)하고 부정(不淨)한 이미지들을 부정(否定)해 우리를 매료하는 독특한 이미지로 변형시켜 내 놓는다. 그러면서 스스로 이미지 필터로서의 평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단원 미술관 전시장에는 고풍스러운 삼베 위에 흉측한 외모로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다주는 여신” ‘흑암천을 그린 <자매>가 건너편 벽에 걸린 두 점의 붉은 <>을 명상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외모를 흉측하게 만든 피부의 흉들을 담담히 마주하는 평정심의 상태. 이것이 부정의 이미지 필터로서의 작가의 모델일지도 모르겠다.

 



순진무구 불안, 거짓 없는 매혹(2019)

정일주
월간 퍼블릭 아트 편집장

9점으로 구성된 <Dummy>, 이 작품은 불교 회화 <구상도>에서 시발됐다. 사람이 죽어서 먼지가 되는 과정을 9가지의 단계로 재현한 <구상도>욕망의 덧없음이란 불교 철학의 정수를 다룬다. 그러나 박웅규가 <구상도>에서 집중한 것은 그 철학적 내용이 아니다. 그는 육체의 변이 과정을 자신들의 종교적 수에 빗대어 나누고 의미를 부여하는 형식성 그 자체에 의미를 둔 채 작업을 들이팠다. 불교에서 숫자 9의 의미는 지대하여 그 영향은 말 할 수 없이 크며 설령 교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더라도 그 숫자가 지닌 상징의 힘은 인지하고 있다. 왜 사람이 소멸하는 과정을 9개의 단계로 나눴는지, 박웅규는 불교의 저의에 혼을 담그고 그 담금질을 통해서 작품으로 가는 길항을 더듬어 간다.
제목 ‘Dummy’ 껍데기란 뜻처럼, 작가는 주로 종교에서 구축해온 다양한 형식(껍데기)들을 빌려와 전혀 다른 것으로 제시하는데 이번 연작은 작가 본인이 주로 다루는 형식형태구조 등이 어떻게 그리기의 방식과 연결될 수 있는지 고민했다는 점에서 의미 깊다. <구상도>에서 육체 변이 과정은 크게 형태와 질감의 변화로 구분되는데 작가는 이것이 마치 회화적 표현의 가능성과 같다고 여겼다. <구상도>에서 제시되는, 점차 바스러지고 말라가는 육체가 종이와 먹 그리고 물을 다루는 자신의 작업 특질과 유사하다고 헤아린 것이다.
 사실 사람은 알 수 없는 생명체다. 태양 때문에 살인을 할 수도 있는 존재이자, 제 어미의 죽음에도 슬퍼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 카뮈는 「이방인」의 뫼르소를 통해, 사람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가치를 매기는 것만큼 거창하게 인간적이지 않다고 진즉 지적했었다. 박웅규가 <구상도>에서 캐치한 사람(한때 사람이었던 대상)은 바로 뫼르소의 그것과 닮았다. 그의 작품에서 사람은 무조건 존중받아야할 대상이라기보다 그저 담담히 한 객체로 존재할 뿐이니 말이다. 한편 박웅규의 작품에는 대상, 이미지, 공백이 제각각있다고 어떤 해석도 원치 않는다는 듯이 바리게이트를 제 몸에 두른 채, 미술은 특히나 자신의 작품은, 사람이 매기는 것만큼 크게 의미심장할 까닭이 없다는 듯 말이다.
2015년 시작된 연작 <Dummy>, 벌레나 식물의 기이한 형태, 또 피부 염증 같은 혐오스러운 대상들을 성화의 방식으로 그려내는 그림은 공교롭게 시작됐다. 어린 시절, 집에 가득 찬 가톨릭 소품들은 작가에게 호감이기보다 반복적이고, 강박적인 일종의 두려운 대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벌레 시체를 발견한 그는 엄청 징그러우면서도 양쪽이 대칭으로 자잘하게 나누어져 있는 몸의 구조와 형태에서 성화를 떠올렸다. 이후 벌레에서 발견한 특이한 구조나 형태를 신화 혹은 종교적 방식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혐오, 더러움, 부정함을 주제로 다양한 작업을 해왔으나, 이 시리즈에 이르러 작가는 비로소지속적으로 연작을 이어가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그간 <Dummy> 작업을 통해 표현의 틀이 어느 정도 양식화됐음을 깨달은 작가는 신작을 통해 그리기의 방법론도 구체화한다. 그것은 단순히 기계적 그리기 방법을 완성하는 것이 아닌 일종의 화풍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 작가는 그려지는 질감의 양태가 형태의 성격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형식을 만든다는 기존의 회화적 개념을 기본으로 깔아 농익혀 놓았다.
박웅규의 작업은 종교와 긴밀하게 맞닿아있다. 실제 어떤 특정한 종교의 교리와 연관되는게 아니고 추항하는 것은 더더군다나 아니지만 일정 부분 종교의 언어로, 형식으로 작업을 풀어내는데다 각색된 내용으로 그는 종교를 힐난하기도 하니 결코 무관하지 못하다. ‘부정한 것을 뼈대 삼아신성한 것의 형상을 덧씌우기도 하고, 그 반대로신성한 것위에부정한 것의 피부를 뒤덮기도 하며 작업 안에서 이 두 가지를 저울질하는 작가는 세밀하고 강박적인 묘사로 수행하듯 그림을 완성한다. 이런 작가의 태도는부정한 것을 그리면서 즐거워하는 찝찝한 마음을 상쇄시키는 일종의 장치이자, 그 자체로 부정한 태도로써의 양식이기도 하다. 실제로 종교에서는 고통이나 고난을 반복적으로, 게다가 스스로 자처해서 수행하고 그 끝에서 마침내 종교적 구원(카타르시스)에 이르게 되는데, 그는 이러한 종교적 수행의 방식이 매우 불건전하고, 변태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작가의 태도는 작품의 형상뿐만이 아니고 질감으로도 이어진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 장지와 먹은 반복성에 따라 전혀 다른 물성으로 완성된다. 그리는 만큼 표면에 흔적이 남는 것이다. 캔버스와는 달리 붓이 지나갈수록 종이가 상하고, 상한 종이와 스며든 먹물은 그 어떤 바탕재로도 대체가 불가능한 질감으로 남는데, 종이가 상할수록 먹의 발색이 더 깊고 풍부해지는 모순을 작가는 의도한다.
더럽고 야한 원초적 본능을 고스란히 응축해 2016년 영상작업 <객마신경>을 만들었듯, 박웅규는 이야기를 극단으로 치밀기도 하고 어렴풋하게 감추기도 하며 일관된 이야기를 푼다. 신작으로 이어진 <Dummy> 외에도 <가래> 시리즈나 전혀 공개되지 않은 다른 작업들 모두 하나의 맥락으로, 각각 소재도 매체도 다르지만 언제나 같은 것들에서 발원하고 얽매인 사투로, 어릴 때부터 작가가 기민하게 반응했던 알레고리를 재현하는 것이다. 도처에 널린 대중문화의 이미지 또한 자신이 꾸준히 제기하는부정성의 양가적 태도로 바라보고 있음을 드러낸 <객마신경>은 작가의 일관된 태도와 관념의 활화임을 증명한다.
개인적인 성향 몰아의 경지에서 출발한 작업들을 통해 피상적 거대 담론을 다루거나 사회적 발언을 한다기보다, 개인의 밑바닥에 위치한 과녁 같은 감정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박웅규의 작업은 화살촉을 가는 전사처럼 비장하다. 허나 그는 작업의 주제의식이 현대 사회를 어떻게 반영하고 발화하고 있는지는 끊임없이 뒤엎고 자문하며, 자신의 작업에서 다루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껍질에 불과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 껍질의 환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에 대해 지속적으로 파헤쳐 말하려 한다.

피도 눈물도 없이 감정이 말라버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저마다 마음속에 감추어둔 유토피아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예술은 그 유토피아를 현실에 내뱉고 이를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이어주는 중계자 역할을 한다. 관람객들은 작가가 재구성한 상상의 산물 사이를 거닐며 인간 내면의 세계에서 주물 된 빛나는 사고들을 경험한다. 무미건조하고 찍어낸 듯한 일상을 지내는 이들에게, 그러니 예술은 오아시스인 거다. 박웅규의 작품도 그렇다. 차마 불순해 드러내지 못했던 것들을 처연하고 숭고하게 재현한 그의 작품들은 감췄던 사고를 우아하게 대변한다. 그가 완성한 이상야릇한 하모니를 즐기면서, 복잡한 의도 파헤치기의 답은 나중으로 돌려버리는 건 어떨까.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


혐오와 거룩 (Impure sacred), 2017

김정아 (미술비평가)

처음 박웅규 작가의 작품들을 접했을 때, 나는 막연히 내 취향이 아니다, 내 관심사가 아니라고 예단했다. 너무 종교적인데 불경스럽고, 너무 노골적인데 난해했다. 내가 가진 나와 너, 동질적인 것과 이질적인 것을 구분하는 방식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편견과 선입견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참고 기다리자. 작가와 작품은 직접 대면하고 경험해야 하는 법이고, 거기서 나와 그의 시공의 좌표가 만나 예기치 못한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지금까지의 작가의 관심사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종교적 성물(聖物)과 도상(圖像)’, ‘신체적 성기(性器)와 가래(痰)’, 그리고 ‘애니메이션 얼굴(容)’ 등이다. 제각각으로 일관성 없이 들린다. 성물은 성기처럼 보이고, 가톨릭의 도상은 무속신앙의 부적처럼 보인다. 신체의 분비물인 가래는 스님의 성스러운 사리(舍利)처럼 응어리져 배출되어 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괴물인지 외계인이지 구분되지 않는 만화 같은 얼굴은 알 수 없는 생물, 무생물과 겹쳐져 있다. 단순한데 복잡하고, 더러운데 성스럽다. 구상인데 추상같고, 서양화이면서 동양화이고, 수묵화이면서 채색화이다. 누가 저 더러운 가래를 이렇게 정성스럽게 그릴까? 왜 별로 가까울 것 같지 않은 성상과 성기를 이렇게 밀착시켰을까? 질문하게 된다. 마음이 어지러워 진다.
그러나 직접 만난 작가의 모습은 그야말로 반전이었다. 짧은 머리와 하얀 얼굴에 망토 같은 긴 외투를 입고 조용하게 말하는 순한 모습은 흡사 구도중인 수도사 같았다. 도저히 그런 신성모독적, 외설적, 엽기적 작품을 할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작가노트를 보니 그를 사로잡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종교’였다. 어릴 적부터 집안에 가득했던 가톨릭 성물과 성화였다. 예수와 마리아의 모습은 그에게 우울하고 비극적인 성경적 상황인 동시에, 대량생산되어 보급된 조악하고 기괴한 키치 상품이었다. 자신을 억누르던 종교적 의례와 관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저항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종교적 환경은 그에게 잔존하였고 환생하였다.
또 하나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신체였다. 사람들이 드러내어 이야기하기를 금기시하는 성기였다. 그 종교적 성물들은 발칙하게도 성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여성과 남성의 성기가 자웅일체 혹은 성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것은 현실 같지가 않았다. 마치 미지의 초현실, 혹은 익숙한 태고의 어떤 것 같았다. 생물인 것도 같고 무생물인 것도 같고, 자연인 것도 같고 인공물인 것도 같았다. 또한 그가 뱉어낸 가래를 형상화한 구(球)는 중국의 보물인 겹겹이 조각한 상아구를 연상시시켜 지지대 위에 당당히 서있지만, 실상은 드래곤 볼의 피규어에서 온 것이다. 더러운데 고귀하고, 전통적인데 현대적이다. 여기서 신체에 대한 관심은 얼굴로 이어진다. 이 얼굴 연작은 에니메이션적이다. 커다랗고 둥근 눈은 2개에서 3개, 여러 개가 되어 그 구멍에서 액체가 쏟아져 나오거나, 종기가 난 것 같다. 벌레와 낙지, 털이 얼굴을 뒤덮고 있다. 징그러워야 하는데 왠지 귀엽다.
이렇게 뭔가 모순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그의 작품은 직접 보았을 때 또 하나의 반전을 주었다. 종이나 화면으로만 봤던 작품은 실제로 보니 그렇게 섬세하고 단아할 수가 없었다. 성기를 그렸든, 가래를 그렸든, 괴물을 그렸든, 그 무엇을 그렸든 상관없이 점 하나, 선 하나가 살아 있는 공들인 작품들이었다. 서양화인줄 알았는데, 장지(壯紙)에 먹(墨)으로 그린 수묵채색화이자 세밀화였다.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즉 그림의 재료와 기법으로서의 형식은 그림의 대상과 주제로부터 분리되었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과 보여주는 것 사이의 간극이 존재했다. 그는 저항하고 싶은데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외설적인 형상인데 성스럽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괴리는 부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긋남의 의외성이 주는 감동이 몰려왔다.
지금까지 우리의 문화 속 더럽다고 간주되는 것들은 으레 더럽게 묘사되어야 했다. 성스런 것들은 더럽게 묘사되어서는 안 되었다. 혐오스러운 것, 괴상한 것은 그런 모습이어야 했다. 하지만 왜 그래야만 하는가? 이 물음이 순간이 바로 저항이고 재창조의 지점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깨끗함과 더러움(pure and impure)’, ‘사랑과 혐오(love and hatred)’, ‘성과 속(sacred and secular)’, ‘질서와 혼돈(cosmos and chaos)’, ‘가깝고 먼(close and distant)’, ‘안전과 위험(secure and danger)’의 이항대립의 관계를 재고하게 된다. 깨끗한 것은 질서이고 더러움은 혼돈이었다. 사랑하는 것은 가까이 있어야 하고 혐오하는 것은 멀리 있어야 했다. 성스러운 것은 안전하고 불경스러운 것은 위험했다. 이것은 한때 대립이었지만 이제 전도되고, 교차하며, 혼합되었다. 아니 애초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모순되는 것들이 한 자리에 존재했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마구간에서 동물보다 못하게 태어났고, 가장 혐오스런 십자가에서 죽었다. 동정녀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하였지만 세상의 불결한 시선으로 인해 배척 받았다. 원래 그런 것이다. 아름다운 옥에는 티가 있으며, 내 안에는 성자도 성모도 있지만, 괴물도 동물도 있다.
사실 서양 미술사에서 박웅규 작가의 작업은 낯설지 않다. 현대 미술에서 여러 갈래 속에 속할 수 있다. 그래야 한다면 말이다. 즉 종교가 담당하는 삶과 죽음의 원초적 문제, 기독교를 재고하고 저항하는 미술은 항상 있었다. 혐오의 가치와 구별에 저항하는 미술이 있었고, 비정형을 다루는 미술도 있었다. 성과 신체에 집중하는 미술이 있었고, 변신과 변형의 미술이 있었다.
미술사에서 가장 세속적인 작가라 할 수 있는 앤디 워홀(Andy Warhol)도 슬로바키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비잔틴 가톨릭 교회에 다녔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워홀은 거기에 영향 받아 신실했으면서도 동시에 종교적인 것과 갈등하고 씨름했다. 이러한 그의 종교적 관심은 마리아와 예수의 초상이나 최후의 만찬을 다룬 작품으로 직접적으로 나타났고, 죽음과 구원을 다룬 그의 작품들은 그가 결코 종교적 주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1980년대 이후 등장한 yBa(Young British Artists) 작가들 중 크리스 오필리(Chris Ofili)는 성모 마리아를 검은 마리아와 코끼리 배설물, 성기 등으로 ‘성상모독적’으로 표현하여 큰 충격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같은 맥락에서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와 마크 퀸(Marc Quinn), 트레이시 에민(Tracy Emin), 채프만 형제(Jake and Dinos Champman) 등도 삶과 죽음이라는 큰 범주 속 신체의 보존과 부패, 변형된 신체의 기이함, 인간의 성기와 분비물의 노출, 현실 속 사랑과 성의 적나라함 등 우리가 예술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극단적 주제들을 다룬다.
그 외에도 많은 현대 작가들은 인간에게 있는 기존의 ‘밝고, 깨끗하고, 정상적인’ 모습이 아닌 ‘어둡고, 더럽고, 비정상적인’ 모습에 주목하도록 요청한다. 길버트 앤 조지(Gilbert and George), 키키 스미스(Kiki Smith), 폴 매카시(Paul McCartjy), 로버트 고버(Robert Gober) 등은 절단되거나 변형되고, 분비중인 신체를 적나라하게 표현하거나, 인간의 대변, 피, 침, 성기 등 액체의 비정형성이 인간에게 주는 공포감과 불안감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예술과 문화 속에 억압되어 있던 금기를 깨고 인간의 다양한 면모에 대한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한다.
이러한 시도들을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간에, 오늘날 이러한 예술의 흐름은 지속되고 확장되고 있다. 박웅규 작가의 작업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재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서구 작가들이 종교와 신체를 둘러싼 불안과 혐오를 다루는 방식은 대체로 공격적이다. 각성과 충격을 주려는 목적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웅규 작가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은 참으로 온화하다. 우리에게 가르치려 들지도 않고, 우리가 변화하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사로잡혀 있는 것들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흥미롭게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가장 떨쳐버리고 싶은 것,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것들을 그린다. 성모 마리아가 그랬고, 바퀴벌레가 그랬다. 그런 것들을 극도로 세밀하게 묘사하노라면 오히려 떨쳐버릴 수 있었고 혐오하지 않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용감한 정면돌파 방식이다. 그는 ‘사랑과 혐오’, ‘집착과 포기’가 상호 작동하는 세상의 이치를 예술적 실천을 통해 알아버렸는지 모른다.
어쩌면 이 모든 이분법의 적대적 대립은 ‘자아와 타자’를 다루는 궁여지책이었는지 모른다. 내 안에 타자가 있다. 내 안에 괴물이 있다. 내 안에 속된 것이 있고, 혐오스런 것, 더러운 것이 있다. 아니 나 자신이 속되고 혐오스럽고 더러울지 모른다. 어쩌면 그런 구분 자체가 없는지 모른다. 이제 이것을 다루는 방식이 변해야 할 것 같다. 내 안의 그 이질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차별하고 격리하며 ‘타자화’ 시킬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싸 안고 보듬어 줘야 할 것 같다.
여기서 박웅규 작가가 우리에게 속삭이는 메시지는 그 ‘문제적 타자’를 공격하고 동화시켜 ‘자기화’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인정하고 포옹하여 공존하게 하는 것이다. 그 구분이 현존한다면 그것을 폐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모호한 경계를 흔들어 유동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내 안의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그가 작품을 통해 말하는 메시지에 귀 기울여 보자.



From the Born Faith to the Matrix of Art, 2016

Lee Sun-young(Art Critic)


Park Woong-gyu’s work has a strong image that originates from sacred icons. To both religious and religionless people, a sacred icon is not just one of numerous images in the world. Looking back on the history of image, we know that there were myth and religious icons before art, and everything that has become flat as a code of equivalence today is also serving as prototype. Julia Kristeva said she does not locate nihil in the position of God as an atheist but aims to confirm ‘essential deterioration of extra sensor’ and ending of ‘ideal(Heidegger) as extrasensory world with religious precepts and God’s grace’ when she wrote [Au Commencement E'tait L'amour, Psychoanalysis of Love] in which Nietzsche declared God is dead. Religion has diminished on the conscious level, but still remains on the unconscious level and is even further expanded. We don’t know if God exists but indeed there are God-related imagination and system with thousands of years of wooden cross.
Religion has longer history than art, and it is more universal. Therefore, humans become human beings through imagination and symbol and sometimes become Homo Religiosus. Religion can belong to the real world, going beyond imagination and symbol to someone, like the artist Park Woong-gyu. Religious images still form a certain conscious environment in system but unconsciously appear as a bizarre shape. The roof of bizarre emotion in Park Woong-gyu’s work lies in religion as if he realizes himself, too. According to Rosemary Jackson’s [Fantasy], Heidegger said ‘something bizarre may happen in proportion to impossibility of truly locating himself in the God’s space’, depicting something bizarre as an empty space caused by losing faith in sacred images. Otto Rank’s [The Concept of Sacredness] interprets that fear is bizarre when it is in supernatural phenomena.
Religious senses about mysterious secret are transformed into bizarre senses undergoing the process of secularization. But, the psychological origin of the two is same. Bizarreness is also noticed in feminism that has challenged males considered to be right(regular). Women from Femme Enfant who is like a pure child to ‘Femme Fatale’ who is like one plotting are bizarre. To put it mildly, they are mysterious. As Freud said, female genitals looking like a bleeding wound that reminds males of castration is the origin of bizarreness. Bizarreness exists in the relationship between something familar and normal. Because a house, female area is the prototype of intimacy and normality, something bizarre is highly like to happen in this area. Bizarreness as a relational signifier strongly argues one gap at the point ‘where we want to ensure unity’(Helene Cixous). Bizarreness is linked to contemporary aesthetics in that is not possible to be reproduced. Although it is not completely denied in Park Woong-gyus’ work, something under obliteration is religiously reproduced. He moves the religious reproduction to the area impossible to recreate.
Of course, his work also lies in mysterious tradition that has been considered to be a cult but is transforming through different methods from existing religions types like Oriental painting techniques and animation. As Oriental icons are added to Catholic, a gap and bizarreness resulting form complexity gain more intensity. In contemporary art that is threatened with loss of aura due to duplication, religion keeping the aura is still an area of emotion enough to be reproduced. Of course, the content is more important no matter what it is, but it forms network that can’t be disconnected because the type itself contains its content. Park Woong-gyu was born a Catholic and grew up in a family with strict discipline until he became an adolescent. His house had more than 200 sacred icons and felt guilty about forgetting pray before bedtime. He doesn’t go to Catholic church now, but religious mood that he experienced when young is still governing him. Since art and religion are divided, artists have reduced the role of religion or been greatly inspired by religion, but they kick away the ladder he climbs up or even suppress it. Unlike this, Park Woong-gy who exposes the condition of his existence is honest as an artist.
Of course, religions prototype or icon is changing in his work, when boundaries or taboos required to become genuine sacred icons are being violated. As honesty is included in dishonesty, his work contains the religions’ unique ritualistic process that is dramatic such as original sin consciousness, guilty conscience, pain and death, resurrection, chaos and recovered order as well as its subsequent ambivalent values such as suppression and fear, and mystery and joy. Recently, his work has been expanded to Oriental religion—if there is no religion in the Orient, going beyond his born faith. He who has wanted to mull over the important backdrop of his spirit and emotion makes ‘monster-like icon by bringing the skin of icons’. The Virgin Mary Statue in his 3-minute video installation work is a bizarre work in which a shadow behind is flowing as a bizarre type of fluid. This work projects an image to the statue, and the video consists of a series of profane scenes violating icon that should keep its perfect shape.
Contaminated boundaries require purification and sublimation. The statue of Virgin Mary was in his living room so his mother prayed with candlelight. The artist switches dark living room and sacred image of the statue. Religion that is not his choice, especially led by his mother approaches as a maternal area. Typically, women are nature and considered to be a sub-divided area that should be tamed by the power of culture. Nature-woman that is not controled in gender ideology is considered as a disaster. Males fully understand the value of maternality, whereas they consider it as a risky area to be swallowed unless they leave to the area of paternity symbolized as the dominant value of society. Maternity that may recollect as they give a birth causes ambivalent emotion. And, there is protection and fear at the same time. Protection is superior during the period when one identifies with the other called mother, including a fetal period. On the other hand, the other or mother becomes an object to be refused at a time when one’s identification is established.
In the work with the statue of Virgin Mary, he is like taking his family’s mood of evening pray and locating it into in this work. But, replacing warm breast milk or tear of sympathy that should be at the Virgin Mary’s heart that provides nurturing and protection is unidentified fluids that might erupt from the lower part of body. Furthermore, it flows over the boundary, thereby violating an orderly system implicit in symbol of life. The 6-minute single channel video work produced in 2014 and 2015 is dominated by red tone reminding me of blood. A large and round shape appears in dark background, but it is not like sun. In this red tone space reminding of internal body, the mass looks like egg or phytol. The mass has a hole which something is flowing out of, which is dark and soggy. Among fluids in human body, blood is the most disgusting and frightening when it is out of its original position. Blood also symbolizes birth and death at the same. Aside from blood, human beings are throughly potty-trained.
Everything should excrete normally at a right time and a given place. But, Park Woong-gyu excretes at the corner of public stage named art. His one of works spits phlegm. An one-minute video work produced in 2012 shows movements of phlegm-type masses. [Phlegm Drawing](2015) Series drawn on paper with a pen looks like a map with an unknown continent of complex outline of phlegm. Body fluids that flow out of abnormal excretory organs are considered to be dirty. Excretion from mouth shows reversal or parallelities, bringing animality that humans consider to overcome. Phlegm Drawing Series that began in 2012 with imagination that the body is filled with tonsillith is spitting tonsillith from neck. That is a kind of self-hatred. But, the artist plans to draw this dirty thing on fine silk. Things spat become a target of noble appreciation.
Phlegm drawing to be drawn with red Cinnabar, a symbol of driving off evil spirits when drawing amulet is a kind of rituals that wash off dirty thing using something dirty. Considering the young artist who just turned 30, this ritualistic emotion and subculture emotion of the same age like Gothic or Cult cross each other. Altar portrait of Buddha or amulet is also called a signifier rather than a deep meaning. Those are also signifiers responding to the artist’s desire to get rid of disgust and guilty. Although his born faith shows a clear relationship between nasal discharge and religion, Buddhism only uses the form. The Orient is more natural-friendly than the West, so it is distinguished from the dominant value of the western religion having original sin consciousness, conquest, advancement and transcendence. The gap is so big that someone contrasts vertical(the West) with horizon(the Orient). The West preempted universality through capitalism, but a world view of vertical and straight needs a balance weight. The artist’s major, the Oriental painting technique will help lead to such a difference.
The video work with a theme of phlegm is expressed as the hundred-and-eight torments of mankind after 36 frames selected from ‘video archive’ are repeated three times. The artist considers it as ‘symbolic phlegm’. That is ‘video amulet’ washing blood with blood and stopping phlegm with phlegm. The video screen can be enlarged and combined with sound to make a stronger effect. In the video work of 2014 and 2015, the scenes of a sphere that soars, flows down, is divided and replayed are flowing with sound effect made by the artist himself. There is a basic video pattern that moves forward exploring its surroundings. But, it is not an empty space that often appears in simulation games. That is like infiltrating inside not outside. It is a representative boundary distinguishing inside from outside of the body. The body filled with an aura of red color is a woman’s body. It is returning to the place that it comes out of. In other words, retrogression is regarded as regression from the perspective of society and ethics. But, this retrogression or regression has long been used in religion and art, and it is now as well.
An eight-min single channel video work produced in 2015 presents a monster that looks like a woman with three red heads or female genitals. Like this, his work expresses things that are attractive but taboos. Although there is no clear narrative, video work is flowing, following time axis connotes narratives. The process of birth and death with motion itself is a dream towards catharsis like Mass ceremony with an introduction, development, turn, and conclusion. The installation scene in his first solo exhibition(2015) [Rebellious Agreement] uses the structure of symmetry that is often used in religion. 410x100cm long pseudo icons where a dominant shape is strongly position in the middle are arranged left and right. It borrows an universal structure, but it is displayed like a person’s church that replaces all with new contents. Images drawn on paper with ink are also symmetry like the arrangement of the drawing. But, up and down are clearly distinguished. Lines filled with writing in small characters inside outline give a soft feeling. If gender is given to this abstract image that is variations with a long oval silhouette whose middle is thinly empty, it is undoubtfully a female.
But, this excessive length trailing on the floor like a long skirt and tight arrangement puts pressure. ‘Rebellious Agreement’ delivers the emotion the artist felt from sacred things excessively found in his house. That is refusing sublimation needing a proper distance. Religion needed something that is one before sublimating, for its sublimation. Julia Kristeva’s [Pouvoirs de l'horreur] saying ‘you would rather stop than kill’ that is explaining the reason why the Bible increases something disgusting. According to Julia Kristeva, the target of disgust is indeed making a response to sanctity. At the same time, it is depletion of sanctity. Religion is gradually disappearing, whereas ethics are only advancing, in the ideology of logic and abstract and the law of system or judgement. Julia Kristev mentions one is struggling in one’s entire life to become an agent of speaker or an agent of law. Then, religion goes down again and works with the power of cracking a hardened symbolic order, and encounters the desire of art pursuing newness and heterogeneity. Park Woong-gyu’s work emphasizes the violation at this intersection.



모태신앙에서 예술의 모태로, 2016

이선영(미술평론가)


박웅규의 작품에는 성상으로부터 출발한 강렬한 이미지가 있다. 종교가 있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종교가 없는 이에게도 성상은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이미지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이미지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예술이 있기 전에 먼저 신화와 종교적 성상이 있었고, 모든 것이 등가의 코드로 평탄해져 버린 오늘날에도 그것들은 원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정신분석]에서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을 때, 무신론자로서 신의 자리에 허무를 위치시킨 것이 아니라, ‘초감각성의 본질적 쇠퇴’, ‘계율과 은총의 권능을 가진 초감각적 세계로서의 이상’(하이데거)의 종말을 확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의식적 차원에서 종교는 축소되었지만 무의식적 차원에서는 여전하며, 심지어는 더 확장되어 있기도 하다. 신이 실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과 관련된 상상과 제도는 엄연히 존재하며, 이미 수 천 년의 전사를 가지고 있다.
예술의 역사보다 종교의 역사가 더 길며, 더 보편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상상과 상징을 통하여 인간이 되며 때로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 된다. 누군가에게 종교는 상상과 상징을 넘어서 실재계에도 속할 수 있으며, 작가 박웅규가 그렇다. 종교적 상들은 제도 속에서 여전히 어떤 공식적인 환경을 이루고 있기도 하지만, 무의식으로 내려앉아 기괴한 형상으로 출몰하곤 한다. 박웅규의 작품에 가득한 기괴한 정서의 뿌리는 그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듯이 종교에 있다. 로즈메리 잭슨은 [환상성]에서, 기괴함은 불온하고 공허한 영역을 지칭한다고 본다. [환상성]에 의하면 하이데거는 기괴한 것을 신성한 이미지에 대한 믿음을 상실함으로서 야기되는 텅 빈 공간으로 묘사하면서, ‘진실로 자기 자신을 신의 공간 안에 위치시키는 것의 불가능성에 비례해서 기괴한 무언가가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오토 랑크는 [신성함의 관념]에서 공포가 초자연적 형상들 속에 위치해 있을 때 기괴하다고 해석한다.
불가사의한 신비에 대한 종교적 감각은 세속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기괴함의 감각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그 둘의 심리적 기원은 동일하다. 기괴함은 정(正)으로 간주된 남성에게 도전해온 페미니즘에서도 주목되었다. 백치같이 미성년화한 부류(Femme Enfant)부터 불길한 음모를 꾸미는 듯한 ‘운명의 여인’(Femme Fatale)까지 여성들은 기괴하다. 좋게 말하면 신비하다.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남성의 관점에서 거세를 떠올리는, 피 흘리는 상처처럼 보이는 여성의 성기야 말로 기괴함의 원천이었다. 기괴함은 친숙하고 정상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여성의 영역인 집이야말로 친숙과 정상의 원형이기에, 이 영역에서 기괴한 것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관계적 기표로서의 기괴함은 ‘우리가 단일성을 보장받고 싶어 하는 그 지점에서 하나의 간극을 강력히 주장 한다’(엘렌 식수스) 기괴함은 재현불가능성이라는 점에서 현대미학과 연결된다. 박웅규의 작품에서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았지만, 말소 하에 놓인 것은 종교적 재현물이다. 그는 종교적 재현물을 재현 불가능한 영역으로 이동시킨다.
물론 그 또한 정통교리에서 이단시 되어왔던 신비적 전통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동양화의 기법이나 애니매이션같이 기존의 종교적 형식과는 방식을 통해 변주된다. 카톨릭에 동양의 도상까지 합세하면서, 복합에서 야기되는 간극과 기괴함도 강도를 더해간다. 복제를 통해 아우라가 상실될 위협에 처한 현대미술에게 아직도 그 아우라를 보존하고 있는 종교는 재 발굴될만한 감성의 영역에 속한다. 물론 무엇이든 내용이 더 중요하지만, 형식 또한 자체의 내용을 내장하고 있기에 종교적 도상을 참조하는 것은 단절될 수 없는 관계망을 이루게 한다. 박웅규에게 카톨릭은 모태신앙이었으며 청소년기까지 엄격한 규율적 환경을 이루고 있었다. 집에는 200개가 넘는 성상이 있었으며, 자기 전에 해야 하는 기도를 깜빡 잊고 며칠 동안을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할 정도로. 지금은 성당을 다니지 않지만, 어릴 적부터 그가 몸담고 있던 종교적 분위기는 여전히 그를 지배한다. 예술과 종교가 분화된 이래로, 예술가들은 종교의 몫을 줄이거나—종교에서 큰 영감을 받았지만 자기가 올라간 사다리를 차는 식으로--더 나아가 억압까지 하는 것에 비해, 자신의 존재조건을 그대로 까발리는 박웅규는 작가로서 솔직하다.
물론 그의 작품에서 종교적 원형이나 도상은 변형된다. 성상이 성상이기 위해 요구되는 경계나 금기 사항들이 위반되면서 말이다. 현재 종교를 떠났든 아니든, 부정 속에는 정(正)이 포함되어 있으니만큼, 그의 작품 속에는 원죄의식과 양심의 가책, 고통과 죽음, 그리고 부활, 혼돈과 되찾아진 질서 같은 그 종교 특유의 드라마틱한 제의적 과정,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억압과 공포, 신비와 희열이라는 양면적 가치를 내포한다. 요즘 작업은 자신의 모태신앙을 떠나 동양의 종교--만약 동양에 종교가 없다면 정신--에까지 관심의 폭을 넓힌다. 자신의 정신과 감성의 중요한 배경을 이루었던 것에 대해 한번쯤 짚고 넘어가고 싶어 했던 그는 ‘도상들의 껍데기를 가져와서 괴물화 된 성화’를 만든다. 2013년에 제작된, 3분 분량의 영상설치 작업에 등장하는 성모상은 뒤의 그림자가 기괴한 형상의 액체로 흘러내리는 기괴한 작품이다. 이것은 마리아 상에 영상을 투사하는 작업으로, 영상은 완전한 형태를 유지해야할 성상을 침범하는 불경한 장면의 연속이다.
오염된 경계는 정화와 승화를 요구한다. 이 마리아 상은 실제로 집의 거실에 놓인 것으로, 매일 밤 같은 시간대에 어머니는 촛불을 켜고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작가는 어두운 거실과 촛불에 비친 마리아상의 신성한 이미지를 전도시킨다. 자신의 선택과 무관했던 신앙, 특히 어머니가 주도했던 그 신앙은 작가에게 모성적 영역으로 다가온다. 통상적으로 여성은 자연이며, 문화의 힘으로 길들여져야 할 미분화된 영역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성이데올로기에서 통제되지 못한 자연-여성은 재앙으로 생각된다. 남성에게 모성은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을 하면서도, 사회의 지배적 가치로 상징되는 부성의 영역으로 떠나지 않으면 삼켜져버릴 위험이 있는 영역이다. 자신을 낳았으니 다시 거두어들일 수도 있는 모성은 양가감정을 야기한다. 거기에는 보호와 공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뱃속에 있었던 시절을 포함하여 어머니라는 타자와 자신이 동일시하는 기간 중에는 보호가 우세하지만, 자기 정체성을 정립해야할 시기에 어머니라는 타자는 거부돼야할 대상이 된다.
가령 마리아상이 등장하는 작품에는 저녁 기도 시간대의 집안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왔다. 하지만 양육과 보호를 제공하는 성모마리아의 가슴에 있어야 할 따뜻한 젖이나 연민의 눈물을 대신하는 것은 몸의 보다 아래쪽에서 분출되었음직한 정체불명의 액체들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경계를 넘쳐 흘러내리면서 생명의 상징에 내포된 질서정연한 체계를 위반한다. 2014-15년에 제작된 6분 분량의 싱글채널 비디오 작업에서는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색 톤이 지배한다. 어두운 배경에 크고 둥근 형태가 등장하지만 태양 같은 존재는 아니다. 신체내의 환경을 연상시키는 붉은 색 톤의 공간에서 그 덩어리는 난자나 피톨같이 보인다. 덩어리에는 구멍들이 나고 이 구멍으로 무엇인가 흘러내리는 등, 어둡고 질척한 분위기다. 인간의 몸속에 있는 액체 중에서 원래의 자리를 벗어났을 때 가장 역겹고 두려움을 주는 것은 피일 것이다. 피는 생명을 상징하기에 동시에 죽음 또한 상징한다. 피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생애초기부터 자기 배설물을 제대로 가릴 것을 철저히 교육받는다.
모든 것은 제때 정해진 장소에서 정상적으로 배설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박웅규는 예술이라는 공적 무대의 한 켠에서 배설한다. 그의 한 작품은 가래를 뱉어낸다. 2012년에 제작된 1분가량의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에서는 가래 형태의 덩어리들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종이에 펜으로 그려진 [가래 드로잉](2015) 시리즈에서 가래의 복잡한 외곽선 미지의 대륙을 그린 지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상적인 배설기관이 아닌 곳으로 나온 체액들은 더럽게 여겨진다. 입을 통한 배설은 입과 항문의 관계가 전도 또는 평행성을 보여주며, 인간이 이미 극복했다고 여겨지는 동물성을 불러들인다. 2012년부터 시작된 가래 드로잉 시리즈는 목에서 나오는 편도결석을 뱉어내면서, 몸속에 이런 더러운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혐오다. 그러나 작가는 이 더러운 것을 곱디고운 비단 족자에다가도 그릴 예정이다. 경계 밖으로 내뱉어진 것들이 고상한 완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부적 그릴 때 나쁜 기운 쫒아내는 상징인 붉은 색 경면주사로 그려질 가래 드로잉은 더러운 것으로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일종의 제의다. 이러한 제의적 감수성은 이제 갓 30세가 넘은 젊은 작가의 연배를 생각컨대, 고딕이나 컬트같은 동시대 하위문화의 감수성과 교차하는 부분이다. 불교의 탱화나 부적같은 방식 역시 깊은 의미보다는 기표로서 호출된 것이다. 그것들 역시 카톨릭의 이미지들처럼 고뇌와 번뇌, 그리고 혐오감과 죄책감을 씻고 싶었던 작가의 욕망에 부응하는 기표들이다. 그의 모태신앙에서는 비체와 종교의 관련성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만, 불교의 경우에는 양식만 가져다 쓴다. 동양은 서양에 비해 자연과 더욱 친화적이어서 원죄의식이나 극복, 진보, 초월같은 서양 종교에 흐르는 지배적 가치와 구별된다. 누군가는 그것을 수직(서양)과 수평(동양)의 관계로 대조했을 만큼 그 차이는 크다. 서양이 자본주의를 통해 지구적 보편성을 선취했지만, 수직과 전진의 세계관은 균형추를 필요로 한다. 작가가 전공한 동양화라는 어법은 이러한 차이를 견인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된다.
가래를 소재로 한 영상작업은 남성이라면 다들 가지고 있다는 ‘동영상 아카이브’에서 뽑은 36개의 프레임이 3번 반복되어 108 번뇌로 표현된다. 작가는 그것을 ‘상징적인 가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피를 피로 씻어내고 가래로 가래를 막는 ‘영상부적이다. 영상은 화면을 크게 조절할 수 있고, 또한 소리와 결합할 수 있기에 더 강렬한 효과를 자아낸다. 2014-15년의 영상작업에서 구체가 솟아올랐다가 분열되어 흘러내리고 다시 재생되는 모습들은 작가가 직접 만든 효과음과 더불어 흘러간다. 거기에는 주변을 두루 탐사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영상의 기본 패턴이 있다. 그러나 시뮬레이션 게임 등에 많이 등장하는 뻥 뚫린 공간은 아니다. 그것은 밖이 아니라 안으로 침투하는 느낌이다. 몸은 안과 밖을 구별하는 대표적인 경계이다. 붉은 색 기운이 완연한 몸은 여성의 몸이다. 자기가 나온 곳으로 다시 가는 것, 즉 역행은 사회나 윤리적 관점에서 퇴행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역행, 또는 퇴행을 종교나 예술을 오랫동안 사용해왔으며 지금도 그렇다.
2015년에 제작된 8분 분량의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에는 붉은 톤으로 칠해진 머리 셋 달린 여성이나 여성의 생식기처럼 보이는 괴물이 등장하는 등, 그의 작품에는 끌리지만 거부해야할 어떤 것들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정확한 서사는 없지만 시간의 축을 따라 흘러가는 영상작품은 서사를 내포한다. 운동감이 있는 생멸의 과정 자체가 마치 미사의식의 기승전결같이 카타르시스를 향하는 드라마인 것이다. 2015년의 첫 개인전 [불온한 일치]의 설치장면을 보면, 작가는 종교에서 애용하는 대칭이라는 구도를 활용한다. 가운데에 지배적인 형상이 강하게 똬리를 틀고 있고 410x100cm 크기의 길쭉한 유사(pseudo) 성상들이 신하들처럼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보편적 구조를 빌어 왔지만, 모조리 다른 내용으로 바꿔치기한 개인의 성전 같은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종이에 먹으로 그려진 이미지들 역시 그림의 배치방식과 같이 대칭이다. 그러나 위와 아래의 구별은 확실하다. 외곽선 안쪽으로 세필로 가득 채워진 선들은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중앙이 가늘게 비어있는 길쭉한 타원형 실루엣의 변주들인 이 추상적인 이미지에 성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여성이리라.
그러나 긴 치마처럼 바닥까지 질질 끌리는 과도한 길이와 빽빽한 배치는 압박감을 준다. ‘불온한 일치’ 전은 작가의 집안에 과도하게 넘쳐나던 종교적 성물에서 느꼈던 감정이 전달된다. 그것은 적절한 거리감이 필요한 승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는 승화를 위해 승화되기 이전의 것을 필요로 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공포의 권력]에서,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금지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성서가 혐오스러운 것을 자꾸 증식시키는 이유를 설명한다고 본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혐오의 대상이란 결국 성스러움에 대한 맞장구이다. 동시에 성스러움의 고갈이다. 점차 종교는 없어지고 도덕만 전개된다. 논리와 추상적 관념, 체계나 판단의 법칙 속에서 말이다. 크리스테바는 말하는 주체나 법칙의 주체가 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를 따라 내내 벌여야 하는 투쟁을 언급한다. 이때 종교는 다시 아래로 내려가 굳어져 버린 상징적 질서에 균열을 내는 힘으로 작동하며, 새로움과 이질성을 추구하는 예술의 욕망과도 만난다. 박웅규의 작품에는 이 교차지점에서 위반을 강조한다.